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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새서휘 작성일26-09-18 16:57 조회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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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개정판을 내면서 내 인생관을 함축하는 명제로 책 제목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그러다 보니 제가 젊은 시절 좋아한 독일 철학자 니체 철학의 느낌이 나기도 합니다.” 11대 전교조 위원장을 지낸 이수일(74) 고흥마을대학 이사장은 2010년에 회고록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사람들’을 냈다. 최근 그는 책 제목을 ‘내 운명은 내가 만든다’(살림터)로 바꿔 개정판을 출간했다. 그는 유신 시절 대표적인 공안 조작 사건인 이른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남민전) 사건으로 10년 옥고를 치렀다. 박정희 유신 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비밀결사 조직인 남민전 사건으로 모두 78명이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 이사장은 15년형을 받고 노태우 정권 때인 1988년에 특별사면으로 가석방되었다. 그는 지난해 4월 이 사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형 확정 45년 만이다. “지금껏 20여명이 무죄를 받았어요. 저는 모두가 무죄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9일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순천시 ‘여순10·19항쟁 역사관'에서 만난 이 이사장의 전언이다. 그는 개정판에 새로 담은 글에서 자신이 남민전 사건 재평가를 위해 기울인 노력을 기술했다. 민주화운동 인정이나 진화위 진실규명 신청에 앞서 열린 남민전 관련자 논의에서 그는 늘 “적극적으로 신청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진화위 진실규명 신청이유서도 그가 대표집필했다. 그 결과 40여명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고 진화위 진실규명도 이뤄냈다. 특히 진화위 결정은 재심 무죄 판결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그는 책에 “역사 발전은 어느 것 하나 주체적 노력 없이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고 썼다. 먼저 재심 무죄에 대한 소회를 물었다. “우리 사건이 제대로 평가되고 명예회복이 되는 것은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민주화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척도라고 생각합니다 손오공사이트 . 재심재판의 결과만큼 우리 사회가 민주화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내 운명은 내가 만든다’ 표지. 그는 서울 정신여중 교사 시절인 1978년 10월에 남민전 하부 조직인 한국민주투쟁국민연맹(민투)에 가입해 그 산하인 민주구국학생연맹(민학련) 지도위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그뿐만 아니라 관련자들 대부분 남민전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살인적인 독재 정권과 맞서기 위해 조직이 엄격한 비공개 원칙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그가 민투에서 주력한 활동은 박정희 유신 독재 타도를 위한 대국민 전단 살포였다. 그는 1978년 8월 민투가 서울 시내 4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벌인 전단살포 투쟁을 이끌었다. “민투는 비공개 조직이었지만 공개 투쟁이 원칙이었어요. 일견 모순되는 것 같지만 저는 그 원칙이 매우 탁월한 방침이었다고 생각해요. 누가 하는지 드러내지 않으면서 투쟁은 공개적으로 했죠. 그것도 가장 붐비는 거리의 군중 속에서요. 그래야 대중의 신뢰를 받고 파급력도 크다고 봤어요. 제가 참여한 투쟁은 ‘꽃불 1호 작전’인데요. 그 중에서도 서울 청량리 청산학원 옥상에서 대담하게 ‘타도하자 박정희’ 대형 현수막을 내걸었어요. 이를 본 시민 중엔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른 사람도 있었다고 해요. 백주 대낮의 이 투쟁으로 박정희 정부에 비상이 걸렸죠.” 경찰은 남민전 사건을 발표하며 이 단체를 ‘북괴의 적화통일노선에 동조한 자생적 공산조직’이라고 규정했다. 언론도 이 발표를 베껴 ‘북괴 지령을 받은 간첩단 사건’인 것처럼 몰았으나 정작 재판 과정에서 관련자 모두 간첩죄는 빠졌다 릴게임다운로드 . 그는 남민전은 실제 그 이름으로 활동한 바 없고, 강령으로 봐선 민족주의와 진보적 민주주의에 가깝다고 했다. 남민전 강령 1호는 “유신 정권을 타도하고 민족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연합정권을 수립한다”이다. “(남민전 강령은) 외세를 배격하고 민족 문제는 자주적으로 풀겠다는 정도밖에 나가지 않았어요. 남북통일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도 없어요. 글자 그대로 보면 민족주의적이면서 민중 기본권을 보장하는 진보적 민주주의에 가까워요. 그나마 강령도 종이로만 있었어요. 관련자 대부분이 그 존재를 몰랐거든요. 사건이 터진 뒤 남민전 이름으로 모두 덮어 씌웠죠.” 그는 “재심에서 무죄가 나오다 보니 남민전 관련자들이 억울하게 당했다는 피해자 프레임에 갇힌 것 같아 아쉽다”며 “앞으로 남민전이 민주화 운동에서 한 적극적인 역할이 제대로 평가되었으면 한다”고 바랐다. “입만 뻥긋해도 잡혀가는 엄혹한 독재 체제에서 가장 전위적이면서 가장 치열하게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했고, 운동주체 면에서도 앞선 시기의 대학생과 재야 유명인사 중심에서 농민, 노동자, 교원 등 각계각층으로 넓힌 .이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남민전이 한국전쟁과 5·16 쿠데타로 맥이 끊긴 ‘민족민주운동’을 역사적으로 복원하는 전환。이 된 .도 의미가 크다고 짚었다. “일제 때 신간회가 좌우 합작해 민족해방 투쟁에 힘을 모았잖아요. 하지만 해방 뒤 이승만이 친일 세력과 손을 잡으며 사회주의는 물론 민족주의 세력까지 다 거세해 민족민주운동이 단절됩니다. 진보당 조봉암까지 간첩으로 몰아 죽였죠. 4·19로 민족민주운동 복원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5·16으로 또 단절됩니다. 릴게임 오션파라다이스 그러다 남민전 이후 등장한 1980년대 학생운동이나 재야운동이 스스로 민족민주운동으로 규정하면서 자주·민주·통일을 3대 운동 명제로 내세워요. 민족민주운동이 합법 단체의 공개 운동으로 정식화한 거죠. 여기에는 남민전 역할이 크다고 봅니다.” 유신 시절 민주화 비밀결사 조직 ‘남민전 사건’으로 10년 수감 고초 지난해 재심에서 45년 만에 무죄 “활동 당시엔 남민전 존재조차 몰라 강령으론 민족주의·진보적 민주주의” 정년 뒤 고흥에 마을대학 등 설립해 지속가능한 지역공동체 만드는 노력 최근 ‘내 운명은 내가 만든다’ 출간 그는 16년 전 초판이 나온 이번 책의 가치를 이렇게 자평했다. “제가 수감된 시기의 감옥상황이나 옥중투쟁을 거의 전면적으로 드러냈어요. 4·19 이후 수많은 정치범이 투옥되었지만 이런 보고서는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수감 초기 4년을 비전향장기수와 미전향 국가보안법 수인이 갇힌 ‘특별사동’에서 보냈다. 책엔 이 기간 그가 만난 장기수들 이야기와 특별사동 수인들이 교도소 수용 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한 투쟁이 자세하다. 그는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박관현 열사가 옥중 단식 투쟁을 하다 의문사했을 때 특별사동 수인을 대표해 박 열사가 죽기 전 사흘간 갇힌 ‘특수감방’을 직접 확인했다. 그는 책에 ‘특수감방이 소리가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완전히 밀폐돼 구조적으로 사람을 죽이게 되어 있는 곳’이었다고 적었다. “1983년 이래 교도소 생활을 한 이들은 모두 박관현의 신세를 졌다고 할 수 있죠. 박관현 이후 교도소 수용 환경의 일부 개선이 이뤄졌거든요. 박관현의 투쟁과 희생으로 교도소 관행과 재소자 처우가 10년쯤은 앞당겨졌다고 봐요.” 책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옥고를 겪던 류락진 선생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그는 배우 문근영의 외조부이다 바다이야기오락실 . 이 이사장은 수감 중 류 선생에게 서예를 배웠다. “선생님은 자상하고 웃는 표정으로 누구에게나 친절했어요. 어느 날 가족 면회를 다녀온 뒤 표정이 유난히 밝아 물었더니 사모님과 가족이 다 와서 세배를 했다는 겁니다. 집에서 돗자리까지 가져 와 사모님도 함께 큰절을 했다고요. 그 말을 듣고 사모님이 어떤 분인지 뵙고 싶더군요. (가족 세배는) 자라는 아이들에게 감옥의 아버님에게 존경심을 갖게 하려는 어머님의 교육적 의식이면서 남편에 대한 애틋하고 인간적인 사랑의 표현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남민전 사형수인 이재문과 신향식의 옥중 영결식 현장에 있었다. 이때 김남주 시인은 시 ‘전사 1’과 ‘전사 2’를 지어 직접 낭송했다. “분위기는 비통했지요. 특별사동은 모두 독거방이어서 투쟁하거나 기념식을 할 때는 중앙 복도에 대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소리가 아주 크게 울립니다. 묵념하고 노래하고 시를 낭송하고 애도사를 하고 우리 나름대로 의식을 치렀죠. 특히 김남주 시인의 ‘전사 1’과 ‘전사 2’ 낭송은 단순한 애도를 넘어 비장한 투지를 불러일으키는 묘한 힘이 있었습니다.” 경남 함양이 고향인 그의 인생 이력은 이번 책의 제목이 왜 “내 운명은 내가 만든다”인지 잘 보여준다. 그는 1988년 석방 직후 바로 교육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전교조 위원장까지 지냈다. “조직사건 경력자 중 저처럼 대중운동에 복귀해 정착한 사람은 드물죠.” 그가 전북 김제 금산상고를 나와 1971년에 연고도 없던 대구의 경북대 수의학과에 들어간 것도 대구가 4·19 이후 야당성이 강한 도시라는 이미지가 가장 중요한 이유였단다. “고2 때인 1969년 8월에 박정희의 3선개헌을 반대하는 야당 집회가 전주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조퇴하고 전주공설운동장에 갔어요.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씨 등이 유세를 했는데요. 바다이야기 조작 그날의 유세가 제가 정치적으로 각성을 하는 계기가 되었죠.” 그는 경북대를 1년 다니고 중퇴하고 서울로 향했다. “경북대 이념서클 정진회에서 활동하면서 졸업 뒤 농촌으로 가려던 제 생각에 근본적인 회의를 하게 되었어요. 정치와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농민도 잘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1974년 성균관대 사학과에 들어간 그는 학생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노동운동에 투신할 준비를 하기 위해 교직에 진출하였으나 “예기치 않게” 남민전과 연결되었다. 이수일 이사장. 박병섭 제공 그는 해직 20년 만인 1999년에 복직해 서울지역 교사로 근무하다 2011년에 당시 전남지역으로 자원해 학교를 옮겼다. 2015년 고흥 도화고에서 정년퇴직해 지금껏 고흥에 살고 있다. “제가 오랜 세월 서울에서 산 것은 결코 서울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제가 추구하는 활동을 위해 힘든 서울 생활을 감수한 거지요. 언제부터인가 더는 서울에서 내가 할 역할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다시 원。에서 생각하게 되었죠.” 그는 퇴직 후 고흥에서 사회적협동조합 고흥온마을학교(2015년)와 고흥마을대학(2021년)을 잇달아 만들었다. 그가 현재 이사장으로 이끄는 고흥마을대학은 ‘참다운 삶을 함께 찾아가는 배움의 학습 공동체’를 내세우고 있다. 지난해부터 학부 체제로 전환해 인문교양·농림축산·해양수산·생활자원·문화예술 다섯개 학부를 운영한다. “고흥마을대학이 교육부 인가 1호 마을대학입니다. 현재 전국의 7~8개 마을대학들이 함께 연합체를 만들자는 제안이 있습니다.” 고흥마을대학엔 50여명이 활동하는데 원주민과 귀농자가 섞여있단다. “귀농 초기는 정착 과정이 쉽지 않아요. 마을대학이 그런 어려움을 풀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지역소멸 위기에 있는 농어촌에서 지속가능한 지역공동체를 일궈내는 일이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가장 절실할 일로 믿고 있다고 했다. -serif; 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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